2010. 5. 31. 18:07 Archi-tour_Overseas/Paris(2009)

관리 소홀이라고 밖엔 표현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이 마을 자체의 슬럼화가 어느정도 진행이 된건지....
우중충하고 불안감이 고조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건축가의 건물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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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lvation Army Refuge in Paris was Le Corbusier's first opportunity to create accommodation for the urban poor. The compact site provided the chance for a radical approach both to bringing in light and space and to laying out the entrance halls to accommodate the Salvation Army's reception process. The core of Le Corbusier's design was the dormitory slab with a sheer glass curtain wall. Critical to the success of this south-facing glass wall was to have been a technologically ambitious system of double glazing and air conditioning ('respiration exacte'). These were never built as intended, and the sheer skin of the wall was lost to Le Corbusier's trademark brises soleils later on in an attempt to prevent the inhabitants from overheating. In the spirit of the free plan, Le Corbusier took the entrance hall components out of the dormitory block, constructing a geometric pathway through separate reception buildings outside (text from www.galinsky.com).

http://www.mimoa.eu/projects/France/Paris/Cit%E9%20de%20Ref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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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Rue Cantagrel, 75013 Paris, France, 1929 ~ 1933
싱거미싱-社(Singer Sewing Machines) 재산의 상속녀인 왕족 폴리냐크(Polignac)의 인도주의적인 기부에 의해 만들어진 파리-市의 구세군(Salvation Army) 빈민 보호소는 서측의 깡따그렐-街(Rue Cantagrel)와 동측의 슈발레-街(Rue du Chevaleret)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빈민 보호소는 르 꼬르뷔제에게는 도시서민 주거시설을 위한 최초의 작품이다. 프로젝트 개발은 1929년에 시작되었으며, 설계를 맡은 건축가 르 꼬르뷔제는 그의 독특한 디자인 방식으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고, 1933년에 완공되었다.
남/북의 인접한 건축물 사이에 장축이 동서로 형성된 부정형 대지조건 때문에 유럽의 전통적인 중정형 건축 양식 설계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협소한 대지(compact site) 안에서 구세군의 요구사항, 외부인 출입관리 절차(reception process)를 위한 주출입홀(entrance halls)의 배치 그리고 충분한 빛(light)의 도입과 넓은 소요실(space)을 수용하기 위해서 르 꼬르뷔제의 혁신적인 디자인 접근방식(radical approach)이 필요로 했다. 르 꼬르뷔제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요시설을 구분하여 명확하게 분류하고, 지원시설들을 근접시키는 근대적인 디자인 방법을 적용했으며, 빈민 보호소 프로젝트에서 요구된 주요시설 群은 다음과 같다.
출입시설 – 주출입홀
서비스시설 – 트럭에 의한 서비스 통로
관리시설 – 접수홀과 접수관리사무실/상담소(원형공간)
사회복지사무실/진료소
경비실
집회실
식당시설 – 남/녀 거주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규모
주방과 그 부속실
숙소시설 – 500 ~ 600 침상(beds)의 규모로 남/여 분리
대지의 지반은 매우 연약하여 지하 15m 깊이까지 철근콘크리트 말뚝을 박아 기초를 보완해야 했다. 또한 빈민 보호소의 핵심구조(core)는 넓은 숙소를 위한 철근콘크리트-造 각층 슬래브(dormitory slab)와 투명 유리 커튼월(a sheer glass curtain wall)로 구성되었으며, 실의 칸막이 벽은 벽돌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까다로운 여건을 근대건축적인 방식으로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설계안에 대해 건축심의위원회는 사선제한선 보다 외벽이 40cm가 높다는 이유로 불허하였다. 이에 따라 르 꼬르뷔제는 외벽면을 내측으로 돌출부분 만큼 경사지게 다시 계획하여야만 했고, 오히려 이로 인해 시각적으로는 경쾌한 느낌의 외관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빈민보호소의 설계상 특징은 실내공조시스템(respiration exacte)의 도입과 외벽면의 기밀성을 시도한 최초의 주거시설이라는 점이다.
약 1,000㎡ 면적의 정면 창문의 복층유리 시스템(double glazing system)을 적용하여 실내 공기의 기밀을 유지하여, 여름에는 공조를 통해 쾌적한 공기를, 겨울에는 햇볕을 통해 따뜻한 열원을 보존하는 방식을 채택하려는 야심찬 시도였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투명한 복층 유리는 르 꼬르뷔제의 차양시스템(brise soleils)에 의해 그 기능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이 차양 시스템은 이후 작품에서 르 꼬르뷔제의 대표적인 건축요소로 실내 과열(overheating)을 방지하는 기능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또 다른 특징은 자유로운 평면(the free plan)을 구현하기 위하여 르 꼬르뷔제는 주출입홀을 숙소棟(dormitory block)에서 분리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출입시설을 외부로 분리함으로써 기하학적인 출입통로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성에 대해 윌리엄 커티스(William J.R. Curtis / 1948~ / 건축사가)는 그의 책 ‘르 꼬르뷔제 – 이상과 형태(Le Corbusier – Ideas and Forms, 1986)’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보자르 양식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통로에 대한 명확한 재해석이며, 중세 城의 성채, 문루(門樓), 해자(垓子)와 도개교(跳開橋)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은유적 도치법에 의해 과거 전제정치의 두꺼운 벽체는 근대적인 해방을 암시하는 투명한 정면으로 대체되었고, V자로 지지하고 있는 철재 캐노피는 위로 올려진 도개교와 같이 느껴진다.’

'clever reinterpretation of a Beaux-Arts ceremonial route... was directly inspired by the bastions, gate-house, moat and drawbridge of a medieval fortress. By metaphorical inversion the thick walls of past despotism became the transparent facades of supposed modern emancipation. The steel canopy with V-shaped tubes supporting it could be read as a drawbridge turned on its head.'

- 건축설계정보참조 -

posted by hamtaengs